배종대교수의 형법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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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종대(2005-12-30 14:23:55, Hit : 17344, Vote : 1571
 [채점평] 좋은 답안, 이렇게 쓰라!

좋은 답안?

2005.12.15일 - 오늘로써 3일에 걸친 3차 면접도 끝나고, 이렇게 올해는 또 저물어가는가 봅니다. 그렇지만 또 내년을 기약하면서 아직도 미로를 헤매고 있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 마디쯤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왕도(王道)’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 ‘사도(邪道)’로서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실패의 길이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법률가의 자질을 저하시키는 직접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지요.
누가 좋은 답안 써서 좋은 점수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삼척동자한테 물어도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좋은 답안은 좋은 판결문, 잘된 공소장 쓰는 것만큼 힘 든 일이지요.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좋은 답안 쓰는 게 이들보다 훨씬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보다 잘 쓰면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체의 5%정도는 무릎을 칠 만큼 잘 된 답안이 있으니 결국 이들이 절대다수를 기죽게 하는 ‘원흉’인 셈이지요. 충분한 분량을 썼으면서도 읽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고, 읽고 싶은 내용이 기대하는 대로 어김없이 나타나고, 그러면서도 95%의 대중적 구성과 전혀 다르니 신선감도 있고, 오히려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읽는 사람을 더 아쉽게 하는 것이 그들입니다. ‘대중적 구성’이란 같은 자료를 보고 모두 같은 언어, 같은 체계를 구사하는, ‘붙여만 다오!’를 외치는 사람들, ‘남과 차별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남들이 하는 것만큼만 하고자 하는 사람들’, ‘대중 속에 뭍이고 싶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시험이 ‘상대평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남들보다 앞서기를 원하니 세상에 이런 이율배반이 또 있을지 모르겠네요. 95%의 내용은 오십보백보, 대동소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반복, 도무지 개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복사기를 돌리는 듯한 것입니다. 그러니 읽는 사람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신이 아니고 사람인 이상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5%는 적극적으로 붙일 사람의 대상이 되고 95%는 떨어뜨릴 대상으로 전락한답니다. 후자는 처음부터 나쁜 인상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대중적인 것은 가장 개성이 없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상대평가는 곧 나와 남의 차별화입니다.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나를 브랜드화 하는 것이 그 전략입니다. 처음부터 95%를 목표로 하면 지구가 뒤집혀도 5%에 속하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1000명이라는 대량 합격시대에는 ‘합격여부’보다 ‘합격의 질’이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년의 합격자 성적분포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수석합격과 커트라인 사이에는 10점 내외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균 1점(총점 7점)에 약 100명의 수험생이 걸려 있다는 말이 되지요. 이것은 그야말로 0.1점에 인생이 좌우된다고 해고 과언이 아닌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까짓 1점” 이렇게 가볍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그런데 왜 상대평가에서 차별화를 거부하지요? 남과 같아지려고 그렇게 기를 쓰지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이 법률가의 자질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법률가는 소신이 생명입니다. 불이익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여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그냥 대중적 익명성에 숨어서 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런 사람을 훌륭한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겠습니까? 그렇게 소신이 없는 사람이 불의한 권력, 불의한 재물과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정의’를 구현하는 데 앞장서겠습니까?
원래 ‘대중’이란 말은 특색이 없는 집단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개성을 존중하지 않고 남이 하는 대로 유행을 쫓습니다. 노란색이 유행이라면 모두 노란색을 따라갑니다. 그냥 따라 하기만 하면 되고, 스스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못해도 중간은 가니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자위합니다. 그러니 사실 유행은 게으른 사람의 몫입니다. 하지만 유행을 만드는 사람을 보세요.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맹목적 추종으로 창조가 되겠습니까?
유행을 쫓아서 게으르게 공부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적게 읽고 많이 쓰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두꺼운 책은 던져버리고 얇으면서 모든 내용이 간단하게 정리된 것을 택합니다. 생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냥 공식처럼 정리해서 머릿속에 집어넣는데 만족합니다. 처음부터 읽은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쓸 말이 많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목 한 줄에 설명 두 줄이 기본입니다. 결론은 판례가 대신합니다. 판례가 그렇다고 하면 만사 땡입니다. 아니면 “이것은 통설이다”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골치 아프게 내가 무슨 결론을 내리는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놓고도 “논점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고득점의 달콤한 꿈을 꿉니다. 하지만 어느 판사, 검사가 판결문, 공소장을 ‘요약해서’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유를 생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유도 없이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 이유도 없이 유죄를 선고하는 판사를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판사, 검사가 자신의 견해가 통설이 아닐까봐 눈치 보면서 일하는 거 봤습니까? 판례는 왜 다수의견과 별개의견 내지 소수의견이 있습니까? 판례는 왜 변경됩니까? 답안을 쓰면서 자신의 ‘눈치’가 출제한 사람이 누군지 맞힐 수 있다고 믿는 그 ‘신통력’은 얼마나 현실성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고서도 ‘많은’ 점수를 기대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요. 많은 점수는 일단 많이 쓰고 자신의 견해를 당당히 밝혀야지요. 이유 없이 그렇게 하면 ‘억지’, 즉 근거 없는 주장이 되겠지만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논증’입니다. 그걸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은 법률가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와 다른 학설을 썼다고 ‘긋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불특정다수인을 대상으로, 그것도 자신밖에 모르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내세울 수 없는 이유로, 골방에 혼자 않아서 ‘벽을 보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런 사람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상대방은 알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그어버린 것을 무슨 개선장군이나 된 듯이 “킬킬거리고” 있다면, 그 사람의 정신상태는 아주 심각하다고 봐야지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문제는 이런 게 아니고 얼마나 설득력 있는 논증을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론에 이르러가는 과정, 즉 논지입니다. 법률의 마지막 결론은 공소장, 판결문 할 것 없이 어차피 ‘한 줄’ 아닙니까. ‘유죄, 무죄’, 만일 유죄이면 ‘형벌은 얼마’ 그것 말고 무슨 다른 복잡한 결론이 있습니까. 자신의 불충분한 논증을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어서 만회해보겠다는 얄팍한 생각이 논지의 선택을 이도 저도 아닌,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리게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충분한 논증이 뒷받침된 주장은, 설사 결론을 같이 하지 않는 경우에도 상대방의 내심에 “아주 제법이야”, “그럴 듯 해”, “아주 괜찮은 자질을 가졌어”, “똑 소리가 나는구먼...” 아니면 “아, 이런 면도 있겠구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등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게 됩니다. 교수는 교수하고 논쟁은 할지언정 학생하고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런 교수 본 적 있습니까? 그런데 왜 답안에서는 교수가 학생하고 싸울 거라고 가정하지요?      
세상이 점점 젊어지고 있지요. 이 동네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그들은 겁이 없기 때문에 이것저것 눈치를 살피지 않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살지요. 세상을 뒤집어볼 수 있는 그 용기가 그들을 앞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신선한 것으로 평가하게 합니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재다보니 되는 일이 없는 겁니다. 시집, 장가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청춘 때는 사랑하나로 족하다고 하지만, 어디 나이 들어 보세요. 백 가지, 천 가지도 더 따지니 될 일이 있겠어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원칙적인 면에서는 요령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요령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때로 필요하기도 합니다. 삼복더위에 대동소이한 글을 수 천 장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사람의 수고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용빼는 재주를 부린 답안이라 하더라도 전문가의 안목을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가장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전체 내용을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제목을 붙여주는 것은 읽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95%가 붙이는 고답적인 제목을 달려고 애쓰지 말고 결론의 키워드를 제목으로 뽑으면 좀 좋습니까. 신문기사의 생명은 그 타이틀을 어떻게 뽑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쁜 사람들은 제목만 훑어보고 내용을 짐작합니다. 신문은 기사가 아니라 타이틀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95%의 제목이 다 똑 같으니... 지루한 사람 더 지루하라고 염장 지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더운 여름에 난로 갖다 안기는 격이지요. 성의 있게 읽어주도록 차별화를 해야 합니다. 흥미를 유발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재미없는 소설 끝까지 봅니까? “당신이 보던지 말든지 나는 내 방식대로 내 갈기겠다, 읽는 것은 당신의 임무 아니냐”, 그러면 읽는 사람도, “그래 좋다, 나도 내 방식대로 ‘내 갈겨서’ 보겠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 만일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그 피해는 누구한테 돌아가지요?
시간만 많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런 저런 고려를 다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요? 그러나 경쟁이 무엇입니까? 경쟁은 조건을 묻지 않습니다. 아니 물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한계,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경쟁의 근본정신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러나 5%는 그렇게 합니다. 풍부한 내용을 많이, 빨리 그리고 알아볼 수 있게 -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여러 가지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습니다. 5%는 적은 숫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내’가 못할 뿐입니다. 그런 능력은 타고 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경쟁에 이기기 위한 첫째 조건은 훈련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많이, 빨리, 알아볼 수 있게” 쓰는 연습을 해봤습니까? 안했으면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의 잠재적 능력은 무한합니다.
어설픈 요령, 정보가 사람 잡습니다. 내가 공부한 만큼만 평가받겠다는 정직한 생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100을 읽어도 50밖에 못쓰는 것이 사람입니다. 50을 읽고 50을 쓰지는 못합니다. 기껏해야 20-30이겠지요. 결론은 많이 읽어야 많이 쓸 수 있습니다. 5%를 지향하세요. 그렇게 해도 50%에 들 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95%를 지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새해 모두 건강하시고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2005.12.15일 밤, 집주인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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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형사소송법 제7판(2006.8.3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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